아담과 하와의 타락시기와 그 기준을 어디로 보아야 하는가.
혹자는 사단과 하와의 대화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고 또한 일반 독자들 역시 이러한 그들의 시각에 어느 정도 같은 관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잠시 배재한 채 마치도 고아같은 하와 개인의 상태에서만 보려하기에 그러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과 당시 아담, 하와의 관계를 보면, 하나님과 이들이 맺은 율법관계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의 섭취 유무에 관한 것이었다.
“너희가 다른 것은 임의로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을까 하노라”
이들에게 내린 율법은 오직 선악과에 관한 것이었다. 그럼 이들은 선악과에 관한 율법만 제대로 지켰어도 사실 아무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발생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요지를 찾아가는 동안 완전한 인간을 요구했던 독자들의 시선은(아마도 아담, 하와 자체의 처음 상태는 완전한 의의 상태로 여기는... 이는 웨슬리 역시 그렇게 보았었다.) 아담과 하와가 완전성에 있어 거의 하나님과 같은 상태로 여기고 있다는 거다.
한 몸의 개념-하와
하와가 사단과의 대화를 한 것에서 이미 문제가 발생했다고 지적하는 것에 대해 다시금 짚어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대화를 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면 그건 무리있는 지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단과의 대화에 대한 율법은 언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화라는 것은 상대와 내가 주거니 받거니 자신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인데 이것에 의해 상대가 움직일 때 비로서 말을 건넨 이의 의도, 즉 상대의 씨가 내 안에 뿌려진 상태인 것이다.
쉽게 말해 내게 상대의 씨가 심겨지는 것을 대화의 의도를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다.
복음의 씨로 비유하셨던 예수님은 복음을 듣고도 그것이 뿌리를 내리느냐, 자라느냐, 그리고 열매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 복음의 결실이 다를 수 있음을 말씀하셨다.
사단의 설득 역시 듣고서 열매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 저들의 범죄를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듣고서도 이미 그 자체가 범죄함으로 된다면 우린 모두 귀머거리의 상태로 태어났어야 되거나 의미를 새길 수 없는 뇌사상태로 태어났어야 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듣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지으셨는데 이것이 과연 무리일 수있을까. 즉 우리에게는 듣는 기능과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태어나는데 만일 이러한 상태에서 들은 것이 죄가 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듣고서 그 말이 그 의도대로 실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하와의 경우 듣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 문제다. 그것도 독단적으로 말이다. 한 몸으로서의 상태가 아니기에 이미 문제는 발생한 것이다.
이제 이들의 타락 관계와 시점을 정리해보면 분명 2가지의 내용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추측이나 여러 사견들을 통해 그럴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보다는 내용의 흐름에서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발견해내야 할 내용을 보아야 한다.
한 몸의 불균형, 한 몸의 상태로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에서의 균열을 보였다는 것과
율법의 준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그 범위를 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단과의 대화를 왜 피하지 않았냐고 말씀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단과의 대화에 대해 책망을 하셨다면 그건 이미 주어진 율법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씨가 뿌려졌어도 그것이 자랄 수 없도록 하는 장치는 이미 그들에게 주어졌다. 그것이 둘이 한 몸될때의 상태에서 가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 몸이 아닌 반쪽의 상태에서 사단의 말을 들어보니 그대로 씨가 심겨지더라는 것이다.
혹자는 사단이 유혹을 선택한 이가 굳이 하와인 이유를 아담 보다 열등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 이것 역시 무리가 가는 의견이다.
사실 이러한 의견 안에는 남성우월, 여성하등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지 않은가. 아담 역시 하와의 존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한 상태가 되는 한 몸의 모습아니던가.
어쨌든 아담 하와 이둘은 둘이 한 몸될때에 비로소 문제가 발생치 않는 모습이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러한 홀로 살아가는데는 문제가 되는 것을 발견하신 하나님께서 이들의 문제를 보완키 위해 하와라는 존재를 지으셔서 한 몸으로서의 완전함을 보완하셨던 것이다.
아울러 아담 역시 독단적인 행동, 즉 뱀의 제안으로 이미 홀로 무너진 하와의 사견을 또한 받아 들였기에 한 몸의 기능이 마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지금의 인간 각자의 신앙과 예수님이 홀로 보여주신 홀로 신앙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건 하와의 범죄이후의 짧은 순간에 주어진 아담의 범죄전 상태에서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되는가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해주셨다.
즉 둘이 한 몸이 되지 못하는 한쪽이 이미 범죄하고 이제 반쪽만 남게 된 한 인간이 어떻게 대처해야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에 대해,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고 여자의 말을 들었으니...’ 즉 인간은 한 쪽이 범죄했기에 나 역시 불완전한 모습으로 될 수 밖에 없다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닌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에서 증거가 되고 있다. 비록 결혼이라는 둘이 한 몸이 되지 않더라도 홀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신 것이다. 어쩌면 사도바울 역시 이 부분에 있어 간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적 의견으로 죄짓지 않고 신앙지켜나가는 것에 대해 결혼하지 않은 자는 차라리 믿음 지키며 홀로 사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던가.
서로에게 연연해 하는 동안 믿음을 저버릴까 염려했던 저 사도바울의 의견을 보면 욕정에 불타는 약점을 제시하며 차라리 육욕의 범죄를 막기위해서 결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극단적 결론을 내리는 것을 보면 그리 권하는 모습은 아닌 것 같다.
평탄한 인간사의 삶은 둘이 한 몸되어 하나님 안에서 자녀기르며 사는 것이지만, 홀로 있을 때에 그리고 부부사이 문제가 발생할 시 상대를 원망하기 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